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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건축물

언젠가 가보고 싶은 건축물-14. 수원화성

by 남촌마을사랑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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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한 정치 구상의 중심지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을 시작하였다.

 

읍치란, 각 지방의 고을 행정중심지 등이 모여있는 곳을 뜻합니다.

 

1794년 정조 18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공되었으며, 성의 설계는 다산 정약용이 하였다.

 

수원화성은 18세기 과학,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성벽 안의 4개 성문을 비롯하여,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팔달문은 4개의 문 중 남쪽에 위치한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위치에 있다.

 

정조와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지나간 곳이다.

 

팔달문의 이름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되었고, 당시 축성되었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현륭원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뜻한다.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서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진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의 수량 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수문으로 만들어졌다.

 

수문 위에는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하기도 하였다.

 

남수문은 2004년에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2012년 6월에 복원 완료하였다.

 

북수문 또한 남북을 가로지르는 수원천 위에 지어진 수문이다.

 

북수문의 별칭이 화홍문인데, 여기서 화는 화성의 화를 의미하고 홍은 무지개를 뜻한다고 한다.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한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각각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문인데, 북쪽에 위치한 장안문이 정문이다.

 

그 이유는 한양에서 임금님이 수원으로 행차할 때 가장 먼저 통과하는 문이 북쪽에 있는 장안문이기 때문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으로 둘러싸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적이 성문 앞으로 다가오면 성문과 옹성에서 

 

동시에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원래 수원 화성에는 총 3개의 공심단이 있었는데 현재는 2개의 공심단이 남아 있다.

 

그 중 서북공심단은 3층 건물로 높이가 13m이다. 아래쪽은 돌을 쌓고, 위에는 벽돌을 구워서 만들었다고 한다.

 

안에 계단이 있어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고 한다.

 

공심단의 특징은 안이 텅 비어있는데 우리 군이 안에서 적군의 움직임을 살펴서 화살이나 화포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수원 화성에는 행궁도 있는데 행궁은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무는 궁을 뜻한다.

 

행궁은 총 5개가 있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행궁이 수원에 있는 행궁이다.

 

총 576칸으로 된 최대 크기의 행궁이라고 한다.

 

정조는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해서 이 행궁을 지었다고 한다.

 

1795년에는 이 행궁에서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느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수원 화성은 일제강점기 시절 갖가지 용도로 사용되며 원형을 많이 손상되었다.

 

1996년 복원을 시작하여 2003년 일반인에게 개장하였다.

 

수원 화성의 공사 기간은 2년인데 이렇게 공사 기간이 줄어든 것은 거중기와 녹로 덕분이었다고 한다.

 

거중기와 녹로 둘 다 정약용이 만든 기구이다.

 

거중기는 기기도설이란 책을 참고하여 만든 기구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이다. 수원 화성 건설 당시에는 1대의 거중기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녹로 또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다. 성이나 집을 지을 때 이용하는데 무거운 물건을 높이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수원 화성의 축성의 모든 과정을 화성성역의궤라는 보고서에 기록하였는데

 

공사도면, 축성 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지금도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보통 조선의 성축은 주변의 지형을 살려서 쌓는 방식이지만 수원 화성은 전통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기술을

 

도입한 성곽이다.

 

조선시대의 성곽은 거주하는 읍성과 전쟁 시 피난처로 삼는 산성으로 기능을 분리하였는데

 

수원 화성은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산성을 설치하지 않고,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2004년 미국토목학회에서는 역사적인 토목 구조물 상의 대상으로 수원 화성을 선정하기도 하였다.

 

수원 화성은 다른 성에 비해 성벽이 4m 낮은데 그 이유는 18세기부터는 화포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형태의

 

전쟁 방식이 있었다. 그래서 성벽이 높으면 오히려 대포의 표적이 되어 무너지기 쉽기 때문에

 

성벽을 낮춰서 대포를 맞더라고 크게 타격이 가지 않아 성을 사수하는데 유리하게 하였다.

 

또한 보통 화성 같은 성을 축성할 때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지만,

 

수원 화성 축성 때는 기술자와 백성들에게 일한 만큼 돈을 주는 노임제를 시작하였고

 

돌도 크기에 차이를 둬 돈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이런 노임제는 장인들의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혁신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수원 화성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축성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처음에 수원 화성이 복원, 보수되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부정적이었으나,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치밀하게 기록된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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